이러한 해석은 당시 일본의 신좌파가 추구했던 '일본혁명'이 일본 노동계급을 혁명의 주체로 세우는 것과는 다른 층위로 일제 타도를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사건 이후 여러 신좌파 조직들이 자아비판을 했고, 그 해 호세대학을 자퇴한 다이도지 마사시, 아라이 마리코 등도 8월부터 연구모임을 꾸려 일본의 조선침략사 등을 학습하기 시작했다.
연구모임이 꾸려진 이후 1974년의 미쓰비시 폭파 사건 이전에 연이어 발생한 여러 폭파 사건의 표적이 된 장소와 시설에도 간과할 수 없는 호응의 내력이 있다.
무기 수출을 멈추지 않는 한국 기업에 지속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한국의 활동가들, 비용을 주변부로 외주화하는 탄소 자본의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일본 청년들의 모습에서, 댐 건설에 저항한 말레이 선주민과 이에 '호응'하여 싸웠던 50년 전 무장전선이 미래의 동료들에게 보낸 투병통신(投瓶通信)의 메시지가 뒤늦게, 가까스로 당도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혈연으로 이어진 부모-자식 관계가 아니었던 다이도지 마사시의 어머니 다이도지 사치코, 마사시의 면회를 위해 호적상 여동생이 된 다이도지 지하루도 사형폐지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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