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시사기획 창> ‘느림의 가치, 올레'

  • 2024.02.20 14:21
  • 3개월전
  • KBS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영감을 받아 2007년 9월 탄생한 제주올레. 역사가 10여 년에 불과한 비교적 '어린' 길이지만, 이제는 다른 나라 도보 여행길에 '영감을 주는' 모델로 발돋움했다. 일본과 몽골에 올레길을 수출하고, 스페인과 캐나다, 스위스, 타이완, 호주 등 세계 각국 13개 도보 여행길과 '우정의 길'을 맺었다.

일본 규슈에 2012년 처음으로 수출된 '규슈올레'는 개장 10주년을 맞이했다. '올레'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만큼, 조랑말 모양 '간세'와 청·홍색 리본 등 제주올레의 표식을 사용하고 운영 체계를 그대로 따른다. 제주올레는 이 같은 브랜드 사용료로 매해 100만 엔(한화 약 900만 원)을 받는다.

시작은 한국인 관광객을 불러모으기 위해 도입한 길이었지만, 규슈올레는 일본인이 더 많이 찾아 걷는 길이 됐다. 지자체의 올레 유치 열기 속에 한때 규슈에만 20개가 넘는 올레길이 개발되기도 했다.

별다른 관광 자원이나 인지도가 없었던 지역에 길을 내면서 도보 여행객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곳이 되자 '올레꾼 전용 료칸', 포장해 들고 갈 수 있는 '올레꾼 전용 도시락'까지 등장했다. 

지난해 11월, 일본 동북 지역 미야기현에서도 다섯 번째 올레길을 열었다.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미뤄졌던 개장이었다. 미야기현은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 당시 밀어닥친 쓰나미로 1만여 명에 달하는 사망자와 1천 명이 넘는 실종자가 발생하는 등 큰 피해를 본 지역. 동일본 대지진 당시 일본 전체 사망자의 절반 이상이 미야기현에서 나왔다. 

규슈올레 성공 사례를 본 미야기현은 '상처받은 지역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 올레길을 내고 싶다'며 손을 뻗어왔다.

2007년 처음 선보인 제주올레는 지난 16년간 우여곡절도 많았다. 홀로 걷는 여행객들의 안전사고 문제도 있었다. 발길이 뜸했던 곳에 사람들이 몰리자 전망 좋은 곳마다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사유지를 지나는 올레길은 코스가 변경되는 일도 자주 겪어야 했다. 십수 년 전 봤던 제주의 자연 풍광이 '개발 바람' 속에서 점차 사라져가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제주의 자연과 마을을 지나며 제주의 '속살'을 걷는 올레길은 지속 가능할 수 있을까? 제주도의 자연과 문화가 사라지면, 제주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다. 걷지 않으면, 길도 사라진다. 길은 새로 내는 것보다, 유지하는 게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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