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 세계보건총회 개막을 불과 사흘 앞두고 전 세계 보건의료의 수장인 제6대 WHO 사무총장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사무실에 앉아 보고서를 읽는 대신 “현장에 답이 있다”며 일년에 지구 7바퀴 반을 도는 강행군을 하며 전 세계 어려운 이웃을 직접 만나 그들을 위한 해법을 찾았던 사람, 故 이종욱 박사다.
그가 보건의료의 최전선에서 서거한 지 어느덧 20년. 거인은 떠났지만, 그가 전 세계 오지와 감염병의 최전선에 뿌려놓은 변화의 씨앗들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행동하는 사람(Man of Action)’ 이종욱 박사의 뜨거운 유산과, 그 뜻을 이어받아 세계를 바꾸고 있는 사람들의 감동적인 실화를 에서 따라가 본다.
2026년 5월, 전 세계 보건의료의 심장부인 스위스 제네바 WHO 본부에 거인을 그리워하는 세계 보건 수장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故 이종욱 박사의 서거 20주기를 맞아 열린 이번 추모식에는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과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 WHO 사무총장을 비롯해 빌게이츠재단, 세계백신면역연합 등 글로벌 보건 기구를 이끄는 리더들이 한자리에 결집한다.
테워드로스 사무총장을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 대표들의 추모사가 장내에 울려 퍼지고, 이어 이종욱 박사의 모습이 담긴 추모영상이 모니터에서 흘러나오자 장내는 이내 그리움과 숙연함으로 물든다. 참석자들은 오직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행동하는 사람(Man of Action)' 이종욱의 뜨거운 삶을 가슴 깊이 새긴다.
추모식이 열린 EB(집행이사회) 룸 밖 복도에는 그의 숭고했던 보건 외길을 되짚어보는 특별 사진전이 열렸다. 1970년대 경기도에 위치한 성라자로 마을의 한센병 봉사 현장에서 시작해 WHO 피지 사무소 시절, 그리고 세계 보건의 지형을 바꾼 '3 by 5' 에이즈 치료제 보급 선언과 최초의 국제 조약인 '담배규제기본협약(FCTC)'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앞서갔던 거인의 거침없는 족적이 생생하게 남겨져 있다.
무엇보다 이번 20주기의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바로 WHO의 비상상황실인 SHOC 룸에서 펼쳐진다. 2003년 사스(SARS) 사태 당시 "다음 위기는 반드시 온다, 지금 대비해야 한다"는 이종욱 총장의 강력한 결단으로 처음 탄생했던 이 공간이 2026년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마침내 'JW Lee SHOC Room'이라는 공식 명패를 단다.
코로나19 팬데믹을 넘어 새로운 바이러스의 위협에 맞서는 첨단 보건 사령탑으로 새롭게 태어난 이 공간은, 이름만 남은 기념관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도 전 세계의 감염병 정보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며 작동하는 이종욱 박사의 '살아있는 유산'이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작된 헌신의 유산은 동남아시아의 깊은 산악 지대, 라오스로 이어진다. 라오스는 세계 보건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이종욱 박사의 숭고한 보건 철학이 깊게 숨 쉬고 있는 유서 깊은 현장이다.
의료 혜택의 사각지대였던 라오스 시엥쿠앙의 산악 오지 마을, 아득한 산길을 뚫고 보건소 의료진이 직접 마을 주민들을 찾아가는 ‘모자보건 순회진료(아웃리치)’ 현장이다. 비가 오면 다른 지역과 이어진 길이 끊어져버리는 마을에, 출산을 앞둔 산모를 찾아가 산전 진료를 하는 모자보건 프로그램은 이 지역의 산모와 아기들의 사망률을 줄이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임신과 출산에 관한 지식이 없었던 산모들은 순회진료 때 나눠주는 임산부 영양제와 철분, 엽산 등을 받기 위해 아웃리치만을 기다리기도 한다. 이제 오지마을 산모들에게는 임신과 출산이 생명을 걸어야 하는 어렵고 두려운 과정이 아니다.
씨엥쿠앙 공립병원에는 최근 들어 산모들의 발길이 늘었다. 한국의 지원으로 도입된 초음파 장비 때문이다. 초음파 기계가 오기 전까지 의사들은 산모의 상태를 촉진이나 문진을 통해서 짐작할 뿐, 문제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어떤 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초음파 기계를 지원받은 후부터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문제들을 포착해 조기에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 적절한 검진을 받지 못해 출산 중 산모와 아기를 잃어야 했던 슬픔의 땅이, 이제는 고위험 임신을 선제적으로 발견하고 치료하는 희망과 생명의 땅으로 변모하고 있다.
가나에는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거나, 사고, 혹은 당뇨병으로 인해 손과 발을 절단한 장애인이 늘고 있다. 이들에게 적절한 의지(신체 일부를 대체하는 인공 신체)와 보조기의 부재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사회적 고립과 삶의 단절을 의미했다. 하지만 가나 수도 아크라에 위치한 국립 의지·보조기센터에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의 지원이 더해지면서 현장에는 기적 같은 변화가 시작된다.
센터 내 작업실, 지원받은 첨단 제작 장비를 활용해 현지 의지·보조기사 장인들이 장애인의 몸에 딱 맞춘 의지와 보조기를 제작하기 위해 정성스레 손길을 얹는다. 오랜 작업 끝에 완성을 이룬 맞춤형 의지·보조기. 평생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이동할 수 없었던 장애 아동이 마침내 보조기를 착용하고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힘으로 땅을 딛고 일어선다. 위태롭지만 한 걸음, 또 한 걸음 스스로 세상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 단순한 치료를 넘어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주는 의미 있는 일이다.
한국의 한 대학병원에 라오스 의사와 간호사들이 이른 아침의 회진부터 수술실까지 병원 곳곳을 누빈다. 이들은 ‘이종욱 펠로우십 프로그램’에 참가 중인 라오스 의료진들이다. 이종욱 펠로우십은 故 이종욱 WHO 사무총장의 "물고기를 건네주는 것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현장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설립된 글로벌 보건의료 인재 양성 초청 연수 프로그램이다.
단순한 일회성 물자 원조나 단기 지원을 넘어, 개발도상국의 의사, 간호사, 보건 행정가, 의공 기사 등을 한국으로 초청하여 전문 교육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연수생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스스로 자국의 보건의료 체계를 운영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의료 자립’을 이룰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핵심 목적이다.
라오스 현지에서는 첨단 의료장비의 부재와 선진 진단 기술의 한계로 인해 고위험 산모나 암 환자를 조기에 발견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놓쳐야만 했던 순간들이 많았다. 그러나 한국의 병원에서의 연수는 그들에게 단순한 의술 배움을 넘어 자국 환자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되어주고 있다.
"한국에서 배운 이 기술과 시스템을 그대로 들고 돌아가, 고국의 환자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전하고 싶습니다"라며 고국으로 돌아가 자국의 보건의료를 이끌어갈 미래의 리더가 되겠다는 라오스 수강생들. 20년 전 지구촌의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故 이종욱 박사의 숭고한 정신이, 오늘날 일산 백병원의 수술실에서 라오스 청년 의사들의 손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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