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의 불꽃이 된 김규식의 정점, 그리고 시련
3.1운동의 불꽃이 된 김규식의 정점, 그리고 시련

사실 미국에서 이승만, 정한경, 그 외에도 여러 사람이 오려고 했는데 일본의 방해 등으로 못 오고 혼자 도착했다. 그리고 8월까지 거의 혼자 힘으로 파리강화회의와 미국 등 외국 대통령들에게 독립 청원서와 비망록 등을 제출했다. 당시 프랑스 지배를 받았던 베트남의 호치민도 파리 강화회의에 와 있었다. 당시 대미 외교는 이승만, 서재필이 독점하고 있었고 김규식에게는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한 공채를 팔라는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이후에도 1920년대 레닌의 독립운동 자금, 1930년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 자금을 둘러싸고 임시정부 내의 파벌 싸움이 엄청나게 심하지 않았나. 공채가 애국금을 대체하는 게 아닌데, 이승만은 애국금을 없애고 미주의 재정관할권을 장악하려 했다. 그러다가 하와이에서도 공채를 팔아야 하는데 김규식 후배이자 이승만 지지자였던 송헌주가 하와이에서도 미주처럼 국민회가 아니라 구미위원부가 돈을 걷어야 한다고 하자 이승만은 하와이에서는 국민회가 자금을 거두게 내버려 두라고 했다.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들을 조직화하고 자금을 모으고 기세를 높여서 행동을 해야 하는데 자신의 권력 장악에만 몰두하면서 3.1운동에 기댔던 사람들의 에너지를 쇠잔하게 만들었다. 한 가지 궁금한 건, 이승만이 도대체 뭐길래 그렇게 대통령을 시켜주고, 공채 요구 같은 무리한 요구도 결국 들어줬는가 하는 점이다. 결국 이승만, 서재필은 완전히 실패하면서 신한민보도 문 닫게 되고 구미위원부도 임시정부가 해체하라고 하고, 이승만도 탄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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