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 실망한 김규식, 모스크바로 향하지만…
워싱턴에 실망한 김규식, 모스크바로 향하지만…

이후 10년 가까이(1923-32년) 상하이, 톈진 등에서 교육자 등으로 활동하다가 1931년 일본의 만주 침략 이후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이 활기를 되찾자 한중 합작에 의한 독립운동 노선을 추구하며 1933년 두 번째 도미 외교를 벌인다. 미국의 이승만, 서재필이나 국내의 이상재, 송진우 등이 워싱턴회의에서 독립의 계기를 찾으려 했다면 김규식, 여운형은 러시아의 협력에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극동민족대회에서는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당시의 임시정부 같은 조직이 아니라 중앙혁명 지도기관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이후 레닌이 지원한 혁명 자금(40만 루블)을 놓고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임시정부 등이 그야말로 난장판을 벌이면서 1922년 4월에 결국 모든 활동이 중지되고 실패로 끝난다. 김규식이 미국에서 인문 교육을 받은 사람이고 서방식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이 있는 사람인데, 극동민족대회에서는 공산당 후보위원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을 비판하고 러시아를 긍정하는 '대변신'을 한 이유가 무엇인가. 일종의 독립운동 방편으로 미국 중심의 외교, 독립 노선에서 러시아 중심의 모스크바 중심의 외교로 전환한 것이었다. 이르쿠츠크파는 혁명 운동에 쓸 돈을 한국 독립에 쓴다고 반발하면서 상하이파가 자금 횡령을 했다고 주장한다. 레닌 자금을 두고 상하이파, 이르쿠츠크파, 임시정부가 싸우는데, 어쨌든 극동민족대회에서 임시정부가 한국 혁명운동의 중심이 아니고, 새로운 민족 혁명운동의 중심 기구를 만들기로 했으니까 지금 50명 모여 있는 이들이 대표가 되어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에 김규식이 동조한 것 같다. 이승만은 대통령 행사나 하고 돈이나 뜯어내고 있을 때, 독립운동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만들어졌다니까 안창호가 달려와서 중심이 되어 자금도 모으고 사람도 포용해서 운영한 것이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파리강화회의와 극동민족대회에서 외교가, 독립운동 지도자로서 쌓아 올린 김규식의 명성과 정치적 자산이 큰 타격을 받았다.

#김규식 #한국 #이르쿠츠크파 #여운형 #임시정부 #러시아 #당시 #이후 #극동민족대회 #이승만 #독립운동 #레닌 #혁명 #중심 #미국 #상하이파 #활동 #자금 #모스크바 #상하이 #사람 #독립 #임정 #중국 #외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