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과 여운형, 3.1운동의 마중물이 되다
김규식과 여운형, 3.1운동의 마중물이 되다

상하이나 베이징에 흩어져 있는 해외 한인 대표들이 모여서 독립운동의 큰 조직, 대표성 있는 중심기관을 만들자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해외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조직, 임시정부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근대적 국민으로서의 자각은 이미 미주 국민회가 만들어진 1909년에 있었고, 1917년도가 되면 해외 독립운동가들이 공화주의에 입각한 독립운동을 조직하자고 했으며, 그것이 3.1운동을 준비하게 되는 사상적 조류라고 볼 수 있겠다. 사실 파리 강화회의에 가서 조선 독립 이야기하는 게 지금 생각하면 아무런 가능성이 없는 일이다. 여운형과 김규식은 윌슨 대통령에 대한 독립 청원과 파리강화회의 참석으로 3.1운동이 벌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안 했지만, 여러 가지 조건들이 결합하면서, 이들의 활동은 3.1운동의 단초를 열게 된다. 책에 따르면 여운형이 1918년 11월 27일 상해에 온 윌슨 미 대통령 특사 찰스 크레인을 만나서 민족자결주의라는 것을 알게 되고 바로 윌슨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전달하는 한편, 벼락같이 신한청년당을 만들어서 김규식을 파리 평화회의 특사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한국 사람이 파리 강화회의에 가서 독립을 청원하고 있다는 것은 굉장한 촉발제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김규식이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파리에 가게 되지만, 자기의 정체성을 신한청년당이 아니라 동제사와 신규식과 함께했던 맥락을 계승하는 흐름 속에서 이해했다. 당시 국내에서도 3.1운동을 준비했고 최남선, 이상재, 송진우 등이 윤치호를 파리에 대표로 보내려고 했는데 그가 대단히 '현실적인' 판단으로 '이거 택도 없는 소리야'라며 거부했다고 한다. 당대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영어도 잘하고 명망도 있고 국제적인 커넥션도 있으니까 윤치호가 한국을 대표해서 파리에 가서 독립을 호소해야 된다는 요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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