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그늘을 만들고, 바람은 시원한 길을 터주고, 동굴은 쉼터가 된다. 자연이 오래도록 품어온 여름 명당 마을에서 몸과 마음의 더위를 덜어내는 기운찬 여름 밥상을 만난다.
푹푹 찌는 더위를 피해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찾아 떠나고 싶은 계절이다. 하지만 멀리 떠나지 않아도 내 집 앞과 마을이 자연 피서지인 여름 명당 마을이 있다. 숲과 계곡이 깊어 한낮에도 서늘한 마을, 산과 바다 사이를 오가는 바람이 머무는 마을, 단오 때까지 얼음이 언다는 동굴을 품은 마을에서는 여름을 이겨내려 애쓰기보다 자연의 품에서 잠시 쉬어가며 여름을 보낸다. 자연이 차려 준 냉기(冷氣) 위에 정성과 온기(溫氣)를 얹어 차린 제철 여름 보양식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충전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치악산 자락 깊은 곳, 오래된 숲이 마을의 시간과 사람들의 믿음을 고요히 품고 있다.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신림면 성황림마을에는 평소 출입이 어려울 만큼 귀하게 보존돼 온 특별한 숲 ‘성황림’이 있다. 주민들은 이 숲을 지키는 신목인 할아버지 나무’와 ‘할머니 나무’가 마을을 보살피고 신림면을 지켜준다고 믿으며, 대대로 숲을 돌보고 그 곁에서 삶을 이어왔다.
날이 더울수록 물이 더 차다는 계곡에서 김일한(55세) 씨는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이웃 주민들과 족대를 들고 천렵을 즐긴다. 일급수에서만 산다는 민물고기에 수제비를 넣어 얼큰하게 끓인 매운탕은 땀 흘린 몸을 든든하게 채워주는 이곳의 여름 보양식이다. 치악산 자락에서 난 수리취를 넣고 떡메를 쳐 직접 만드는 수리취떡은 이제는 귀해진 음식인데, 일 년에 한 번 단오 때가 되면 마을 사람들이 함께 수리취떡을 만들어 나눠 먹으며 여름을 무탈하게 나기를 기원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지난가을 산에서 주운 도토리를 곱게 갈아 오랜 시간 정성껏 묵을 쑤고, 시원한 육수에 잘 익은 김치를 곁들여 먹는 도토리묵밥도 여름철 별미다. 숲과 계곡이 내어준 제철 식재료에 오랜 믿음과 추억을 더한 성황림마을의 시원하고 넉넉한 여름 밥상을 만난다.
세 개의 산이 마을을 감싸고, 남해를 마주하고 있는 경상남도 고성군 거류면 마동마을은 바다에서 불어온 해풍이 산자락을 타고 마을을 지나고,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은 다시 들녘을 식혀준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이곳을 '바람이 쉬어가는 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산비탈을 따라 이어지는 다랑이논은 이 마을의 또 다른 풍경이다. 척박한 산비탈을 일구어 계단식 논을 만들고,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 한 방울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곳곳에 '둠벙'을 팠다. 물이 귀했던 고성의 해안가 마을에는 지금도 400여 개가 넘는 둠벙이 남아 있다.
바닷장어를 사골처럼 푹 고아 살과 뼈를 발라낸 뒤, 추어탕처럼 걸쭉하고 얼큰하게 끓인 바닷장어탕은 여름철 힘든 논일을 마친 마을 사람들에게 가장 큰 보약이다.
또 여름에 입맛 없을 때, 마을 잔치나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면 꼭 먹는 음식이 있다. 시할머니로부터 며느리에게 이어진 간자미무침은 대대로 이어온 손맛이 고스란히 담긴 음식이다. 여기에 가까운 바다에서 채취한 우뭇가사리를 여러 번 씻고 고아 우무묵을 만든 뒤, 고소한 콩국을 부어 먹는 우뭇가사리콩국과 밭에서 바로 뽑아온 여름 도라지로 만든 도라지양념구이까지. 산과 바다가 함께 품어준 여름 명당에서, 자연과 사람이 함께 빚어낸 넉넉한 밥상을 만난다.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북면 공기리 산속 깊은 곳엔 단오 무렵까지 얼음이 남아 있어 ‘얼음굴’이라 불리는 신비로운 동굴이 있다. 밖은 30℃가 넘어 푹푹 찌는데 동굴 안은 12℃로 서늘한 냉기가 느껴진다. 6·25전쟁 당시 주민들이 전쟁을 피해 얼음굴에 숨어 지냈다고 한다. 얼음굴 깊숙한 곳에는 마르지 않는 샘이 있는데 이 물을 마시고 아픈 몸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귀한 약수란다.
산이 많은 공기리에서는 예부터 옥수수와 감자가 주된 양식이었다. 옥수수 알갱이를 하나하나 빼내어 솥에 쌀과 함께 안치고 동굴에서 떠 온 귀한 약수를 부어 밥을 짓는다. 노란 옥수수 알갱이가 하얀 쌀밥 사이에 알알이 박혀 구수하고 달짝지근한 맛으로 고단했던 옛 삶을 위로해 준다. 강판에 곱게 갈아낸 감자를 면포에 싸서 꼭 짜낸 뒤, 가라앉은 전분과 감자 건더기를 함께 치대어 수제비처럼 끓여 먹는 감자옹심이는 투박하지만 정직한 강원도의 맛을 그대로 품고 있다.
무더위에도 속이 꽉 찬 여름 고랭지배추로 배추메밀전을 부치고, 은은한 풀 향이 그윽한 곤드레무침까지 해서 차린 한 상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살아온 산골 사람들의 삶을 그대로 닮아있다. 강남 갔던 제비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복을 물고 찾아온다는 복 받은 공기리 마을에서 자연과 함께 쉬어가는 지혜로운 여름의 풍경과 밥상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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