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시간여행자> ‘명성황후 시해 가담자 子’ 우장춘, 역적의 아들에서 식량난 구한 영웅으로

  • 2026.08.21 14:03
  • 2시간전
  • KBS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밥상. 그 익숙한 먹거리 이면에는 먹을 것을 스스로 만들어야 했던 절박한 시대와 그 시대에 응답한 한 과학자의 삶이 있다. KBS 1TV 34회는 해방 직후 식량난에 직면한 한국으로 건너온 육종학자 우장춘,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한국인과 일본인, 역적의 아들과 외부인. 그리고 아버지의 그림자와 세계적인 육종학자. 수많은 경계에 서 있던 우장춘은 왜 한국행을 선택한 전말과 의미를 조명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산지는 비었고 식량은 부족했다. 미군정의 미곡 자유시장 정책 이후 쌀값이 1년 만에 약 12.7배 오르며 민생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때 경상남도 농무국장 김종이 일본에서 활동하던 세계적인 과학자를 찾아갔다. 그리고 해방된 대한민국에 그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우장춘은 한국어 한마디조차 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한국행을 택한다. 1950년 3월 8일 부산항에 첫발을 내디딘 우장춘의 귀국 과정을 따라가 본다.

우장춘의 삶에는 늘 아버지의 이름이 함께 했다. 그의 아버지이자 친일파였던 우범선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연루된 이후 일본으로 건너갔고 우장춘은 일본에서 나고 자랐다. 육종 연구에 몰두했던 그는 ‘종의 합성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으며 세계적인 학술 성과를 쌓았다. 하지만 조선인이었기에 그는 끝내 승진이라는 작은 벽조차 넘기 어려웠다. 일본에 남겨진 가족들의 기억을 통해 과학자이자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우장춘의 삶을 들여다본다.

한국에서 우장춘이 마주한 첫 번째 과제는 종자 자급이었다. 그는 우리 땅의 기후와 토양에 맞는 품종을 개발하기 위해 연구에 매진했다. 한국전쟁의 격변 속에서도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결구배추 ‘원예 1호’를 시작으로 감귤, 감자 등 다양한 품종 개발이 이어졌다. 마침내 1955년 대한민국은 종자 자급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가 시작한 품종 개발과 육종 연구는 후학들에게 이어졌고 오늘날 대한민국은 1만 4천 개가 넘는 신품종을 출원하는 나라가 되었다. 육종학자 우장춘이 한국 농업에 남긴 종자 연구의 의미를 짚어본다.

우장춘은 경계인이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조선인의 성씨를 버리지 않았다. 세계적인 연구 성과를 내고도 일본에서는 여전히 외부인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가족을 남겨둔 채 홀로 대한민국으로 건너와 이 땅에 뼈를 묻겠노라 다짐했다. 그가 한국에서 보낸 시간은 불과 9년 남짓. 짧은 시간동안 그는 한국 농업의 현실을 마주했고 품종을 개발하며 국내 육종 연구의 기틀을 닦았다.

경계인 우장춘은 왜 한국을 선택했나. 그리고 그 선택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오는 8월 23일 밤 9시 30분 KBS 1TV 에서 그의 발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 출처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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