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극장> 포도밭의 점님 씨

  • 2024.11.15 18:04
  • 3시간전
  • KBS

5년 전, 무릎이 아픈 아내 조점님(61) 씨를 위해 남편 이명연(69) 씨는 쪼그려 앉지 않아도 되는 포도 농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아내 점님 씨가 포도 두 송이를 따는 동안 겨우 한 송이를 딸까 말까 한 남편 명연 씨. 달랑 둘 뿐인 포도밭에서 본인은 총감독이라 주로 ‘지시’만 한다니, 결국 쪼그려 앉아서 짓던 채소밭 농사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게 되었다는 점님 씨. 속이 탄다. 게다가 청개구리 같은 말로 아내 기운을 빼기 일쑤인데, 참다못한 점님 씨가 남편에게 회심의 한 방을 날린다. “당신은 로또야, 절대 안 맞아”

남편 명연 씨를 만나기 전, 점님 씨의 꿈은 화가였다. 학창 시절부터 각종 미술대회에 나가 큰 상을 받았고 미대에 합격까지 했지만, 11남매의 막내였던 점님 씨는 연로하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뒷바라지해 줄 사람이 없어 꿈을 포기했단다. 그러던 중, 중매로 일곱 살 많은 명연 씨를 만났고, 그림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달콤한 프러포즈에 결혼했다.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인생. 줄줄이 태어난 삼 남매를 낳아 가르치다 보니 화가의 꿈은 저만치 멀어져 갔다. 설상가상 남편과 하던 식당도 잘 안되고 5년 전, 마지막 도전이라 생각하며 야심 차게 시작한 샤인머스캣 농사.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포도알은 꽉 차게 영글어 대풍년을 맞았건만, 귀한 대접받던 샤인머스캣이 올해는 잘 팔리질 않는다.

그래도 부부의 자부심인 자식 농사만은 배신하지 않았다. 삼 남매를 의사, 회계사, 선박 기관사, 모두 ‘사’자 직업인으로 키워낸 부부. 올해 회계사 딸이 첫 손자를 안겨주더니 내년 2월에는 의사 딸이 결혼을, 3월에는 선박기관사 아들이 세쌍둥이 출산을 앞두고 있다. 들인 공에 비해 몇 배로 잘 자라준 고마운 삼 남매. 어디 그뿐인가, 포도 농사를 시작할 때 두 딸은 대출을 받아 부모님께 빌려드렸단다. 자식에게 빚을 내 시작한 포도 농사이기에 더 애가 타는 점님 씨 부부, 결혼을 앞둔 큰딸의 결혼 비용, 세쌍둥이를 출산할 며느리의 산후조리원 비용까지, 돈 나갈 일은 줄줄이 대기 중인데.... 포도 판매는 영 시원찮고 저장 창고엔 포도 상자가 쌓여만 간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캔디’처럼 씩씩하게 웃어 보이는 점님 씨, 샤인머스켓을 넣은 막걸리를 만들어 새로운 포도 판로를 궁리하고 내년부터는 포도 하우스를 체험농장으로 만들 계획도 세운다. 남편과 티격태격하며 포도 수확하랴, 시어머니 챙기며 집안일 하랴, 여성농업인 회의 다니랴, 종횡무진 바쁜 점님 씨, 그래도 밤이면 나만의 화실에서 포도도 그리고 꽃도 그리며 어릴 적 꿈을 이어 나간다.

2025년, 뱀의 해에 태어날 아들네 세쌍둥이들에게 선물할 그림을 그리며 점님 씨는 생각해 본다. 파란만장한 인생의 항로를 지나며 비록 화가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비록 ‘로또’처럼 안 맞는 남편이지만, 삼 남매 낳아 잘 키워냈고, 이젠 손주들에게 그림을 그려줄 수 있는 할머니가 되었으니, 이만하면 잘 살아온 인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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